"그때, 자신의 성으로 들어서자마자, 시끄러운 것이라면, 무조건 질색을 하던 그 모로세르크경의 눈에 들어온 것은.... 쭉 벙어리 인 줄로만 알았던 자신의 정숙한 부인, 에피코엔느가... 온 성안이 떠나가라 시끄럽게 이것저것을 떠들어대며, 더 이상 커질 수도 없을 만큼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껄껄거리고 웃고있는 모습이었지. 아하하하하----." 거기까지 숨쉴 틈도 없이, 잘도 줄줄줄 떠들어대던 나는, 마치 내가 지금 이 순간, 그 이야기 속의 에피코엔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채, 조그만 가게 안이 떠나가라 한바탕 신나게 웃어 재꼈다. 그 웃음소리 때문에, 순식간에 내 쪽으로 휩쓸려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엔 아랑곳 않고, 나는 그저 손에 쥐어진 잔 속의 붉은 포도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거침없이 들이켰다. 그리고, 눈앞에서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는데?' 를 외쳐대는 친구 녀석들의 다그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유있게 술잔을 탁자위로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으며, 잘 나오지도 않는, 거친 사내들이 술을 음미하는 소리까지, '커억---' 하고 억지로 만들어 내뱉었다. "그래서, 부인 에피코엔느의 그 모습에 충격을 먹은 모로세르크경은 바로 그녀를 침실로 잡아끌고 들어갔지. 대체 언제부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거요?! 라고 모로세르크경은 예의상 아내에게 물었지만... 사실, 그도 이미 성문 앞에서 눈치를 다 깠지. 어떻게 바로 엊그제까지 벙어리였던 자신의 부인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씩씩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겠어?!" 나는 안주로 나온 닭다리를 입에 물고 죽 뜯었다. 그리곤 입안의 도톰한 고기를 부지런히 씹으며, 손에 들고 있던 닭다리를 친구들의 얼굴을 향해 들이밀어 보이며, '안그래? 안그래?'하고 물었다. "흐음, 그렇지." "그래. 그 어떤 훌륭한 주술사의 약을 먹는다 해도, 벙어리였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렇게 수다스러워 질 수는 없겠지." 그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더욱 신이 나서, 모로세르크경의 역할에 몰입한 채, 목청을 높였다. "그래서, 모로세르크경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지. 그렇군! 이 여자는 내가 시끄럽고 말이 많은 여자를 싫어한다는 것을 소문으로 익히 들어 알고, 일부러 나와 결혼하기 위해, 벙어리인척 연기를 해왔던 거야!" "역시, 그랬군." "흐음... 그렇지." 친구들은 자신들의 추리가 맞은 것에, 만족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나는 그들 몰래 슬쩍,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리곤, 느닷없이 주먹으로 탁자를 있는 힘껏, 내려찍었다.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탁자 위의 술병과 술잔들이 갑작스런 충격에 마구 덜그럭거렸다. 하지만, 나의 그 돌발행동에 가장 큰 충격을 먹은 것은, 술병이나, 술잔들보다는 내 눈앞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화들짝 놀란 두 눈을 댕그랗게 뜨고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효과음에 저 정도는 놀라주어야,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기분이 되는 법이었다. "하지만, 에피코엔느의 비밀은 그게 다가 아니었지. 그날 밤.... 소음을 극도로 싫어해서, 여자를, 아니 자신의 부인을 안는 것조차 거부해왔던 모로세르크경은, 그날 밤 처음으로, 마치 징벌을 하듯이 에피코엔느를 덮치게 되지. 눈부시게 나풀거리던 풍성한 금빛 레이스를 주욱---, 잡아뜯고.... 그 안의 깃털같이 새 하얀 속치마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달빛에 푸르스름하게 드러나는 가느다란 다리를 따라서, 모로세르크경의 손이 이렇게, 더듬듯이 쓸려 올라가면...." 처음 이야기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어느샌가 목소리를 착--- 내리깔고, 최대한 끈적끈적한 손놀림과 함께 이어지는 내 이야기에, 눈앞의 동료 녀석들은 가늘게 뜬눈을, 일제히 벌겋게 번득여왔다. "그래서.... 그렇게 에피코엔느의 가장 깊숙하고 은밀한 곳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모로세르크경은, 한순간... 움찔, 하고 움직임을 딱 멈추었지. 그때, 그의 손에는...." "손에는?!!!" 내 그 한마디가 끝나기가 무섭게, 친구 녀석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다급하게 물어왔다. 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잡혔어...." "어?!" "잡혀?!" "잡히다니, 뭐가?!" 나는 씨익---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거기가...." "거기?!" "거기라니---?!" 답답해하며 묻는 녀석들을 향해, 나는 자상하게도.... 내 다리 사이의 중심부를 향해 슬쩍 손가락질을 해 보이며, 씨익--- 웃어주었다. "에에엑----?!" "에... 에피코엔느에게 그게 달려있었단 말이야?!" 경악을 하며, 가게 안이 떠나가라 고함을 내지르는 동료 녀석들을 유쾌하게 바라보며, 나는 여유있게 이야기를 끝맺었다. "사실, 에피코엔느는 벙어리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성격 더러운 모로세르크경을 약올리기 위해, 소년이 변장을 한 거였지. 아하하하하----." 이야기의 그 황당하기 그지없는 썰렁한 결말에, 크게 소리내어 웃는 사람은 그 가게 안에서, 오직 나 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내 이야기에 알게 모르게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꾹 다문 채, 절망한 듯, 푹---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 이야기 속의 모로세르크경이 당했을 일을 생각하면,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몰라∼!" 그렇게 내뱉는 나를 향해, 내 맞은편의 동료 하나가 거칠게 물어왔다.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에 너는 어떻게 속이 시원해질 수가 있는 거냐? 무섭지 않아?! 자신의 정숙한 벙어리 부인이, 알고 보니 세상에 둘도 없는 수다쟁이였고... 게다가, 남자였다는데...." 흥....! 하고, 나는 먼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 속의 잘난 척 재수 만땅의 대마왕 모로세르크경,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지 않아? 왜, 우리 성에도 한 명 있잖아. 초 울트라 잘난척쟁이가. 이 세기 최고의 기사라 칭송 받고있는 Knight 데인 말이야. 물론, 그가 5살 때부터 손에 칼을 쥔 검술의 신동이고, 지금도 이 성 최고의 기사라는 점은 나도 인정한다고." 점점 흥분으로 높아져 가는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것인지, 친구녀석들은 일제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예전처럼 술상을 다 뒤집어엎지 말고, 이제 그만 적당히 침착하라는 듯한 손짓을 부지런히 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한번 의식위로 끄집어올린 Knight 데인에 대한 분노를, 좀처럼 쉽게 떨쳐내 버리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자기가 뭐든지 그렇게 쉽게쉽게 잘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쉽게 할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사람을 완전히 바보 취급에, 지나가는 똥개 취급을 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내가 내뱉는 말에, 내 스스로 천천히 달구어지고 있던 나는, 급기야 가게 안이 떠나가라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나를 보며, 친구 녀석들은 이상하게도.... 평소처럼 화들짝 놀라서, 술상을 붙들어 잡지도 않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나는 이미 잔뜩 흥분해서,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라, 그런 그들의 이상한 상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냐?! 조상 대대로, 유서 깊은 기사가문에서 태어났으면 다냐?! 껍데기가 좀 번듯하게 생겼다고, 성내의 모든 레이디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있답시고, 그 거만함이 하늘을 찌른다고! 그런 녀석들은 그저... 모로세르크경처럼, 수다쟁이에, 남자인 부인에게 한번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렇게 한바탕 조용한 가게 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내지르고 나자, 가슴에 맺힌 한이 서서히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하고 크게 소리내어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자리에 앉으려는 나에게,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그래 니말이 백번 옳다!'고 동조해주지 않던 동료 녀석들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향해 뒤를 돌아보라고 열심히 눈으로 신호를 보내왔다. "왜?" 나는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며, 슬쩍 고개를 뒤로 돌리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내 어깨위로, 악사의 손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유난히 길게 잘 빠진 손가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조용한 술집 안을 싸늘하게 울리는 묵직한 저음.... "그 진심어린 충고.... 고맙게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Knight 류안." 순식간에 바짝 얼어 붙어버린 내가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는 사이, 눈앞의 동료 녀석들은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를 차렸다. "Kn..... Knight 데인!!! 이, 이런 시각에 어... 어떻게 이런 누추한 술집까지...!!" 동료 녀석의 그 질문에, Knight 데인은 내 어깨를 지그시 내리누르고 있던 자신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걸로 벌써 5번째.... 기숙사의 규율을 깨고, 한밤중에 몰래 빠져나가면서까지.... 그리고, 훈련기간동안 금지된 술을 마셔가면서까지.... 떠들어대야 할 이야기가 어떤 것일지, 무척 궁금해서 말입니다...." 음산하게 가게 바닥에 좌악--- 내리 깔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Knight 데인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나는 차라리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눈을 감아버리자, Knight 데인의 무시무시한 목소리는 내 예상과는 달리, 더욱 더 선명하게 내 귓속으로 파고들어 왔다. "Knight 류안.... 당신의 그 지나치게 선정적인 [The Silent Woman] 패러디는 아주 재미있게 잘 들었습니다. 궁중 드라마 작가이신 존슨경이 자신의 글이 이렇게까지 저질스럽게 무단 각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 무척이나 기뻐하시겠군요...." ************** 챙강----! 손에 들고있던 칼을 있는 힘껏 바닥에 내동댕이치기가 무섭게, 광장 안에 모여있던 동료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시선을 모아왔다. "누가 연습을 멈추라고 했습니까?" 하지만, 곧이어 광장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잠시 멈춰져 있던 검을 쥔 손들은 다시금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마주보고 서서, 정해진 룰대로 한번씩 번갈아, 칼을 휘두르고 그것을 받아치는 연습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기사들이 둘씩 짝을 이루어 연습이 한창인 훈련광장의 한쪽 귀퉁이에, 나는 겁 없이 내동댕이친 칼을 주울 생각도 않고 마냥 씩씩거리고 서 있었다. 사실.... 천천히... 그렇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내 앞으로 다가오는 절도 있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냉큼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고 싶은 기분이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들긴 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계속된 혼자만의 이 칼 휘두르기 연습으로 인해, 온몸에 땀이 비오듯이 흘러내려, 이대로 허리를 숙였다가는 땀에 푹 젖은 옷이 찝찝하게 피부에 들러붙을 것이 뻔했기에.... 그리고... 다리며, 허벅지, 허리, 등, 팔 할 것 없이, 온 몸의 근육들이 삐끄덕 거리고 있는 이 상황에,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흙바닥에 뻗어 버릴 것이 뻔했기에.... 나는 애써, 오늘 아침 처음 칼을 잡았던 그 포즈 그대로를 유지한 채, 천천히 다가오는 Knight 데인을, 뻣뻣하게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좋게 말할 때, 칼을 줍는 게 어떻겠습니까, Knight 류안?" 그 인간미 없는 싸늘한 저음에, 본능적으로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지만, 나는 속으로 팽--- 코방귀를 꼈다. 좋게 말하기는, 대체 누가 좋게 말하고 있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칼을 드십시오, Knight 류안." 저거 봐라! 저 입에선 지금, 꽁꽁 언 나무를 뿌리 채 단숨에 뽑아 날려버릴, 한겨울 돌풍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고! 나보다 머리하나는 더 높은 곳에 있는 Knight 데인의 얼굴을, 목이 아플 정도로 똑바로 치켜올려 보며, 나는 이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요구하신 5000번은, 다 휘둘렀습니다만?" Knight 데인 못지 않게 단호하게 말한답시고, 최대한 내리깐 목소리로 그 말을 툭, 내뱉듯이 말했지만.... 왠지,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들은 어떻게 된 것이, 알게 모르게 죄다 건들건들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건들건들한 목소리를, Knight 데인은 사정없이 비웃으며 말했다. "Knight 류안. 당신은 아직, 3905번 밖에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햇빛아래서 같은 동작으로 오전 내내 칼을 휘두르고 있느라,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던 내 얼굴이, 조금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뜨겁게 확--- 달아올랐다. "치, 치사하게 그걸 다 세고 있었단 말입니까?!" "치사한 짓을 하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입니다, Knight 류안. 밤에 몰래 기숙사를 빠져나가고, 금지된 술을 마신 일에 대한 벌은.... 친구들을 꼬셔서 나간 것이 당신이므로, 당신이 혼자 친구들 몫까지 모두 벌을 받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사의 맹세가 고작 하루도 못 가서, 이렇게 흐지부지...." "알았어요! 한다구요! 해요!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Knight 데인의 얼굴에 대고 겁 없이 빽--- 고함을 내지르고는, 냉큼 칼을 주워들었다. 하지만... 죽을 땐 죽더라도, 마지막 발악은 하고 싶었다. 이대로, Knight 데인이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따른다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대신, 동작을 바꿔가며 하겠습니다. 이 한 동작은 이미 3905번이나 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칼을 고쳐 쥐는데.... "그건 안됩니다." "에?!!" 동그랗게 커진 내 눈에, Knight 데인의 고집스런 얼굴이 한가득 들어앉았다. "왜 안 된다는 말입니까?!" "잊었습니까? 이건 벌입니다, Knight 류안." "그럼, 대체 언제까지 이 한 동작만 계속하란 말입니까?!" "5000번이라고 했습니다." "이왕에 벌로 5000번씩이나 하는 거라면, 다른 동작들도 몸에 익히는 것이 좋지 않나요?!" "아니요. 당신은 한 동작이라도 제대로 몸에 익힐 필요가 있습니다." "한 동작이라도.... 제대로?! 그럼, 제가 모든 동작을 엉터리로 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아닙니까?!" 내 얼굴이 더 이상 붉어질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서 벌겋게 끓어오르는 동안, 내 맞은편에 우뚝 솟아 있는 Knight 데인도 거무죽죽하고 차가운 오오라를 거침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훈련광장 안을 가득히 울리던 칼 부딪히는 소리들이, 언제부턴가 뚝, 끊어지고.... 광장 안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와 Knight 데인을 향해 날아와 있었지만.... 서로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기 바빴던 나나, Knight 데인은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Knight 류안. 5000번이 아니라, 이참에 아예, 장작패기 같은 그 무식한 칼 놀림이 없어질 때까지, 밤새도록 마음껏 휘둘러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싫습니다! Knight 데인처럼, 여자들 소꿉장난하듯 칼끝을 가지고 노는 건 싫습니다!" " ...... " " ...... " "그럼.... 차라리 칼이 아니라, 도끼를 휘두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긴, 그 여자 같이 가는 팔로는 도끼는커녕, 칼도 무리인 것 같습니다만." "여자 같다니...." "여자 같다는 소리가 듣기 싫으시면, 더이상 키가 크는 것은 무리일테니.... 근력이나 좀 기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Knight 류안? 그런 의미에서.... 나머지 1095번 후에, 광장 10바퀴도 부탁드립니다." " ...... " ************** 벌컥---, 집사영감이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나를 부축해서 이곳, 내 집까지 나를 운반해 준 동료녀석들은 나를 차가운 대리석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뭐.... 일부러 패대기를 쳤다기 보다는, 그들이 버릇처럼 의관을 바로잡기 위해, 잠시 잠깐 나를 붙들고 있던 팔을 풀어냈던 것뿐이었지만.... 하필이면, 왜 몰래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그러는 거냐고---! 오늘 하루 종일 계속되었던 5000번의 칼 휘두르기와 광장 10바퀴 돌기로, 온몸의 근육이란 근육은 죄다 풀린 상태라, 힘없이 바닥에 널부러진 나는, 넘어진 상태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한 채, 친구녀석들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늬들.... 너무한 거 아니냐? 내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건데? 그게 다, 내가 네 녀석들 벌까지 몽땅 받아줘서 그런 거잖아...." 그 원망 가득한 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고.... 친구녀석들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나를 들쳐업고 오느라, 구겨진 옷을 문질러 편다고, 정신없이 바빴다. 물론, 조금 있으면, 내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아그네스가 마중하러 내려올 테고... 기사가 예의 없이 먼지투성이의 쭈글쭈글한 옷을 입고 레이디를 맞이할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성내에서 소문난 절세미녀인 내 동생, 아그네스를 오랜만에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저렇게나 입이 쭉 찢어진 녀석들을 보고있자니.... 나는 괜한 심술이 꿈틀거렸다. "네 놈들이 아무리 때 빼고, 광을 내도, 우리 아그네스는 못 줘...." 바닥에 넙죽 엎어져있는 자세 그대로, 그렇게 살벌하게 중얼거려 보았자, 그 위협이 그대로 녀석들에게 가 닿을리는 없었지만.... 나는 덤으로 눈까지 번득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의관 정비를 끝낸 친구 놈중 한녀석이, 나를 일으켜 앉히며 말했다. "하여튼, 못말리는 시스터 콤플렉스라니까. 그럼, 혼기가 다 된 아그네스는 어쩔 셈이냐? 평생 독신으로 혼자 외롭게 살게 할 셈이야?" "누가 아그네스를 외롭게 만든대?! 내 말은, 네 놈들 같은 사이비 기사나부랭이들에겐, 내 천사 같은 아그네스를 못 넘긴다 이 말이지. 우리 아그네스와 결혼을 하려면, 이 세기 최고의 기사까지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이 성에서 최고의 기사 정도는 되야지."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쫙 펴며, 그렇게 떠들어대는 나를 향해, 친구 녀석들은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은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을 꾹 참는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거리며, 삐딱한 말을 내던졌다. "그럼 넌, 아그네스의 짝으로, Knight 데인이라도 생각하고 있는거냐?!" "Knight 데이이인∼?! 지금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내가 화낼만한 부분을 제대로 찌른 것에, 기분이 흡족해진 친구 놈들은 능글맞게 씩씩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왜? Knight 데인, 좋잖아?" "그러게! 이 성 최고의 기사일 뿐만 아니라, 이 세기 최고의 기사이기까지 하신 몸이 아니냐?!" 나는 분노로 부들부들 몸을 떨며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안돼! 내가 죽어도 안돼! 미쳤냐?! 그딴 재수 만땅 싸가지 고약한 자아도취 놈의 부인으로 우리 아그네스를 주게---?!" 금방이라도 경끼를 일으킬 듯한 내 그 반응에,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동료 녀석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슬쩍 입을 열어왔다. "류안, Knight 데인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냐?" "몰라서 물어?!! 그 자식이 오늘도 나보고, 장작을 패라느니, 차라리 도끼질을 하라느니, 여자 같은 손목으론 검을 드는 것도 무리라느니.... 그런 말로 날 모욕하는 거 못 봤어?!" "내 눈엔, 네가 먼저 Knight 데인의 검술을 비웃었던 것 같은데?" "내가 안 비웃게 생겼냐?! 엉---?! 남자가 그런 잔챙이 같은 기술에만 연연해서는...." "류안... 잔챙이 같은 기술이 아니고, 사람들은 그걸 섬세하다고 말해." "검술에 섬세한 게 왜 필요해?! 검은 칼끝으로 장난치라고 있는 게 아니고, 남자답게 단숨에 베라고 있는 거야!" 죄다 풀려버린 다리 근육 같은 건 잊어먹은 지 오래... 나는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허공에 대고, 있는 힘껏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흥---! 이라고, 터프하게 코방귀까지 껴 보이는 나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친구녀석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려왔다. "넌, 껍데기 하나는, Knight 데인 만큼이나 섬세하게 생긴 주제에... 알맹이가 너무 틀려...." "그래, 알맹인 완전히, 북부 야만인 수준이지...." 북부 야만인이 어쩌고를 떠들어대며, 친구 녀석들 중의 한 명이 아무 생각 없이, 내 머리를 위로하듯 톡톡 두들겨 왔다. 하지만, 나는 위로고 나발이고, 아무 것도 필요 없었다. 알맹이와 껍데기의 갭이 크든 작든,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이 나를 Knight 데인과 비교한 것만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꽉----!! 내 머리 위에 올려져 있던 친구놈의 손을 순식간에 확--- 낚아챈 나는, 그 짠맛이 나는 손을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물어 버렸다. "끄아아악---!!!" 그 순간, 고전 속의 괴물, 그렌델의 비명소리와도 같은 해괴한 비명소리가 온 집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우왁!!! 윌리엄---!" "얌마, 류안! 이러니까, 네 녀석이 야만인이란 소릴 듣는 거야!! 어서 못 놔?!" "살아있나, 윌리엄?! 의식을 놓으면 안돼!" 친구 녀석들은 필사적으로, 나와 내가 물고 늘어진 친구를 떼어놓으려 했지만.... 나는 아그네스가 내 이름을 외치며 계단을 달려 내려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내 앞에 섰을 때야 비로소, 윌리엄이란 친구의 손을 놓아주었다. ************** 아그네스는 윌리엄의 손에, 익숙한 손놀림으로 간단하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히 여기저기를 다치고 돌아다녔던 나를, 부모님 몰래 치료해 왔던 탓에, 아그네스의 손놀림은 이제 거의 의사 저리가라하는 수준이 되어있었다. 단순한 치료일 뿐이었지만.... 아그네스의 손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한, 바보 윌리엄은 그저 황홀한 표정으로 넋을 아무렇게나 허공에 내팽개쳐 놓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눈 대신 보다 위협적인 이빨을 번쩍이며, 나는 윌리엄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혼자만의 세상에 푹--- 심취해 있는 윌리엄은 좀처럼 쉽게 그런 내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윌리엄을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내가 방 한쪽 구석에 격리되어 있다말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오라버니께서 매사에 늘 이렇게 거칠게 행동하시니까... 아버님께서는 오라버니의 친구들과 저의 혼담은 절대 꿈도 꾸지 말라는 태도이신 겁니다." 슬쩍, 나를 향해 곁눈질을 하며, 아그네스는 차분하게, 하지만 매정하게 그 말을 내 뱉었다. "아그네스...." 나는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그네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친구놈들 중의 누군가를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사모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질 경우, 아버지와 나의 견제에 그 사람이 어떤 대우를 받게 될 것인지 잘 아는 아그네스는 대놓고 그가 누구라고는 아직 밝힌 적은 단 한번도 없었지만.... 아그네스가 좋아한다는 그 사람이, 내 친구들 중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버지에게서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 더 이상 그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아그네스가 나를 책망하는 말을 하자, 나는 잔뜩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원래 앉아있던 의자위로 스르륵 무너져 내리는 나보다도, 나와 윌리엄 사이에 방어벽을 만들고 있던 친구녀석들이 더욱, 아그네스의 말에 상처를 받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상처받은 그들은, 눈이 돌아가라 나를 살벌하게 노려봐 왔다. [우리가 왜, 네놈 친구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차별을 받아야 하는 거냐---?!] 그들의 눈은 일제히 그렇게 외쳐대고 있었지만, 나는 특별히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할 여유가 없었다. 오늘의 아그네스는 왠지 좀 이상했다. 웬만큼 화가 나도, 나에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아그네스는 신경이 조금 날카로워져 있는 듯했다. "아그네스,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조심조심 묻는 내 말에, 아그네스는 한창 붕대를 감고 있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아그네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께서, 제 혼처를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에에----?!!!" 내 친구 녀석들은 일제히 비명 비슷한 소리를 내질렀고, 공기 중을 떠돌던 윌리엄의 혼도 순식간에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입을 쩌억--- 벌린 채,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누, 누구....?"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어오는 윌리엄에게, 아그네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대답해 주었다. "Knight 데인 경입니다. 내일저녁, 저희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아버님께서 특별히 그를 초대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서로 인사를 나눠보라고 권하시더군요." "Knight 데인....?!" 다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조용한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내 동생을, 아그네스를, 이 세상의 그 어떤 여자보다도 사랑스럽다고 목청 높여 떠들어대던, 내 바보 같은 친구들은, Knight 데인이란 말에,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한 듯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쉽게 아그네스를 넘겨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넘겨줘야 할 대상이.... 내 친구 놈 중의 하나도 아닌.... 그 천하의 재수 없는 Knight 데인이라면... 더 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돼----! 그 놈은 절대 안돼!! 그 냉혈한에, 무뚝뚝하고, 자기 잘난 줄만 알고,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눈꼽만큼도 모르는 그런 나쁜 놈에게 널 맡길 순 없어!" 나는 다시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곤, 잔뜩 불안한 표정으로 부산스레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말고, 내 반응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그네스를 향해 말했다. "내가 증명해 보인다!! 그 놈이 얼마나 형편없는 기사인가, 하는 것은. 검술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지 몰라도, 그 놈은 레이디에 대한 예의만큼은 아주 꽝이라고!" 나는 그 언젠가, 자신의 눈앞에서 꺅꺅거리던 레이디들에게 눈빛 한번 건네지 않고, 무뚝뚝한 얼굴로 그들의 곁을 스쳐지나가던 Knight 데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방을 박차고 나갔던 나는, 곧이어, 휘양찬란한 금빛 레이스가 번쩍이는 드레스를 가져와 방바닥에 팩--- 내팽개치며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내일, 이걸 나한테 입혀!" ************** "이건 완전히 [The Silent Woman]이로군." "잔말 말고, 제대로 입히기나 해!" 온몸을 꽉 죄는 속옷의 끈을 등뒤에서 술렁술렁 당기다 말고, 푹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윌리엄을 향해서, 나는 빽--- 고함을 내질러주었다. 그러자, 그 고함소리에 발끈한 윌리엄은 손에 쥐고 있던 끈을 느닷없이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게다가... 그것만으로는 성에차지 않았던지.... 그는 그 무식한 발을 내 엉덩이에 턱하니 얹어 누른 채, 온 몸을 뒤로 눕듯이 기울이고, 자신의 몸무게만큼 무거운 힘으로 끈을 당기기 시작했다. "커어억---!" 내 입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윌리엄 녀석은 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 임마! 날 죽일 셈이냐?! 엉---?!" 시퍼래진 얼굴로 그렇게 버럭버럭 악을 썼을때야 비로소, 윌리엄은 끈을 잡아당기는 것을 뚝 멈추곤,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제대로 입혀 달라며---?! 레이디는 허리가 날씬해 보일수록, 엉덩이가 풍성해 보일수록, 속옷을 제대로 입었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냐?!" 그리곤, 윌리엄은 자신의 손에 길게 잡히는 그 끈을 그대로 꽉 잡아 묶기 시작했다. "이, 이봐....! 숨 좀 쉬게, 조금쯤은 풀어주고 묶어 달라고!" 화들짝 놀란 나는, 급히 사정하는 듯한 말을 건넸지만, 윌리엄은 어제의 복수를 이런 식으로라도 해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인지.... 들은 척도 않고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윌리엄, 네 이노옴∼! 힐끗 등뒤의 윌리엄에게로 시선을 던지며, 내가 막 살기 등등하게 눈을 빛냈을 때였다. 휙--- 소리와 함께, 펄럭이며 날아든 풍성한 속치마가 내 얼굴을 푹 덮어왔다. "자자, 시간이 없다고! 다음은 이거!!" "이것도 허리 쪽을 꽉 졸라매듯이 입어야 한다고 레이디 아그네스가 말했으니까, 있는 힘껏 부탁해, 윌리엄." "저 녀석의 입에서 아직까지 우렁찬 고함소리가 나오는 걸로 봐선, 아직 제대로 졸라맸다고는 할 수가 없지? 안 그래?" 아그네스가 가르쳐 준 순서대로,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준비를 한답시고, 죄다 내방에 모여있던 친구 녀석들은, 남은 꽤나 비장한 각오로 여자들이나 입는 드레스 나부랭이를 고통스럽게 입고 있는 중이건만... 내 고통 따위엔 아랑곳 않고, 그저 이 웃기는 상황에 여유만만하게 싱글거리고들 있었다. 나는 내 얼굴에 들러붙어 있는 그 속치마를 방바닥에 패대기치며, 눈앞의 생각 없어 보이는 녀석들을 향해,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게 다, 네 녀석들이 너무너무 사랑해서 목숨을 거는 우리 아그네스를 악의 손아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라는 걸 잊은 거냐?! 엉---?!" 내 말에, 녀석들은 그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처음 의도가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그 속에 숨은 또 다른 불순한 의도가 느껴져서 말이야." "불순한 의도라니---?!" "네 녀석이 [The Silent Woman]의 에피코엔느가 되어, Knight 데인을 마음껏 골려줄 생각으로, 잔뜩 들떠있는 게 눈에 보인다 고나 할까?" " ...... " 부정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 눈앞의 녀석들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같이 어울려 말썽을 일으키고 돌아다녔던 녀석들이었다. 내 눈이 번득이는 것만 봐도, 녀석들은 내가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충분히 파악해 내고도 남을 녀석들인 것이다. "네놈들....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는 거 아니냐?! 밤길에 뒤통수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생각이 다 들통나 버린 것을 머쓱해하면서도, 그렇게 으름장을 놓는 나를 향해, 녀석들은 야비해 보이는 미소를 씩--- 지어 보이며 말했다. "야, 윌리엄! 저 녀석, 협박까지 할 힘이 있는 걸 보니, 아직 덜 조른 것 같다? 더 꽉 조르라고!" "Knight 데인 앞에서 저 목소리로 떠들어 봐라, 단번에 들통나기 십상이지. 목에서 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 이외에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더해, 더! 힘줘---!" ************** 나를 빙 둘러싼 친구 녀석들은 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겉에서 볼 때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도록 신경 써서 주위를 살피며, 서서히 파티장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에너지 효율면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날렵함이나 스피드 면에 있어서도 현격하게 떨어지니까.... 난, 가끔씩 네 녀석들의 그 큰 덩치나 키가, 쓸데없이 너무 큰 게 아닐까? 하고 쭉 생각해 왔었는데.... 헤에∼, 이럴 땐 꽤나 유용한데 그래?" 조그만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듯 중얼거리는 나를 향해, 친구 녀석들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대놓고 버럭 고함은 지르지 못하고, 그저 일제히 팩 고개를 돌리더니, 살벌하게 눈을 흘겨왔다. 그렇게 노려보고 있다말고, 내 가장 가까이에 붙어있던 한 녀석은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우리가 쓸데없이 큰 게 아니고, 네 녀석이 쓸데없이 너무 작은 거 아니냐? 그리고, 이럴 때만큼은 폭∼ 파묻히니까, 유용하고 말이지." 그 녀석은 모두의 불만을 대변한답시고, 그렇게 내게 따끔하게 한 마디를 한 것이었지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녀석의 양쪽 옆에 버티고 서있던 다른 녀석들이, 그의 옆구리를 쿡, 쿡, 날카롭게 찔러댔다. "너, 미쳤냐?! 저 성질 뭐 같은 녀석,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짓은 하지마! 저 녀석 고함 한번 내지르면, 이번 작전은 말짱 황이라고!" "그래, 조심해 임마. 저 녀석 여장까지 하고 말썽 피우는 걸 들키는 날엔.... 저 녀석의 친구인 우리도, 무사하진 못할걸?" "아그네스와 Knight 데인의 결혼을 막아보기는커녕.... 아마.... 앞으로 평생 아그네스의 얼굴은 못보고 살아가게 될지도 몰라." 아니나 다를까, 그런 말들을 떠들어대며, 나를 향해 걱정스런 시선을 던지고 있는 친구녀석들을 향해서.... 나는 조금 전까지,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네 녀석이 쓸데없이 너무 작은 거 아니냐?], [이럴 때만큼은 폭∼ 파묻히니까], 등등의 말들을 되새기고 있다말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부들부들 몸을 떨어 보였다. 친구 녀석들은 그런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고, 일제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가 쓸데없이 너무 큰 게 맞다고! 그러니까, 넌 제발 아버님에게 들킬만한 짓이나 하지 말아 줘...." 그리곤, 그들은 조금전과 마찬가지로 천천히 파티장의 저편 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팔 사이로, 베란다 창이 나 있는 저편 벽에 등을 기대고 혼자 서 있는, Knight 데인의 모습이 보였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앞으로 천천히 나아갈수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통 알 수 없는 무표정한 Knight 데인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져 왔다. 꿀꺽. 긴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꽤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목을 타고 넘어갔다. Knight 데인과 같이, 타인에게 무심한 녀석을 속여넘기는 일 따위는, 누워서 떡먹기라고 생각했었다. 특히나 레이디에게 통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라면, 더더욱 쉽게 말려들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한발 한발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이 자식.... 평소, 몰래 뒷다마를 까는 놈이면 어떡하지?! 사람들 앞에서는, 마냥 여자에게 관심 없는 척 하다가,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는, 엄청 여자를 밝히는 놈이어서... 그래서, 첫눈에 딱--- 여자·남자를 구분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오른 놈이라면....? 들키는 걸까?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아버지가 길길이 날뛰실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Knight 데인 놈은 분명.... 처음엔 아마....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겠지? 물론, 저 성격이라면, 놀라는 것도 아주 짧은 순간동안 만이겠지만. 그리고 그 다음은, 틀림없이.... 그는 피식---- 소리를 내어 나를 비웃을 것이다. "Knight 데인? 이쪽 레이디는, Knight 류안의 여동생인 아그네스 양입니다." '아,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내 앞을 막아서고 있던 친구 녀석이 슬쩍 비켜서며, Knight 데인을 향해, 미리 정해두었던 대사를 건넸다. 그 말이 조심스레 끝을 맺자, 바닥으로 향해있던 Knight 데인의 시선이 천천히 들어올려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난,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마음의 준비 따위를 마음속으로 정신없이 외쳐대던 나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Knight 데인의 눈과 마주치기가 무섭게, 심장이 덜컥,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정신없던 것이 진정 된 것은 좋았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바짝 얼어 붙어버린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레이디 아그네스....?" 바로 눈앞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Knight 데인이 바로 내 앞으로 걸어와 우뚝 솟아있었다. 힐끔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눈이 보통 때 보다 커진 걸로 봐선, 저게 놀란 표정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놀라는 것도 저렇게 살벌하게 놀랄 수 있는 것일까? "레이디 아그네스?" 대답이 없자, 재차 확인하듯 물어오는 그의 목소리에, 나는 흠칫 어깨를 떨며, 미리 계획했던 대로, 소리내어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 미리 계획한 대로라면, 살며시 부드럽게 고개짓을 해 보여야 했지만.... 잔뜩 긴장한 나는 석고상의 목이 부러져 나가는 것 마냥 뻣뻣하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가 들어올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하고 난 이후에도, 한참 동안을 아무 말 없이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Knight 데인을 다시금 슬쩍 올려다보며, 나는 또다시 마른침을 삼켜야만 했다. 역시, 들킨 건가? 그럼 이제 어떡해 해야하지? 이 자식의 입에서 내 이름이 쏟아져 나오기 전에.... 이 자식이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나를 비웃기 전에.... 내 쪽에서 먼저 손을 써야 하는 거겠지? 기절을 시키고 도망을 간다던가.... 머리 속으로 열심히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지체하고 있다가, Knight 데인에게 선수를 뺏길 수는 없다고 판단하고, 조금 전까지 부풀어오른 치마를 살며시 쥐고 있던 오른손으로, 불끈 주먹을 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꽉 힘이 들어간 내 주먹이 금방이라도 앞으로 튀어나가려고 할 때였다. Knight 데인의 손이 그런 내 오른손을 살며시 잡아, 들어올린 것은.... 그리고, 다른 레이디들의 부드럽게 들어올려진 손과는 달리,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이 쥐어진 그 손등에, Knight 데인의 입술이 떨어져 내린 것은.... "만나서 반갑습니다, 레이디 아그네스." 나를 향해, 레이디 아그네스라고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으로 기뻐 환호성을 지르는 대신.... 멍청하게도, 잔뜩 당황한 목소리를 입밖으로 쏟아내고 말았다. "에엣----?!" 보통 레이디들의 깃털이 나풀거리듯 속삭이는 목소리와는 달리, 꽤나 낮고 괴상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가자마자, 내 뒤를 둘러싸고 있던 친구놈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음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Knight 데인 역시, 내 손을 놓을 생각을 않고 다시금 그 살벌하게 놀란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 무섭다고----! 그렇게 내가 속으로 길게 소리를 내질렀을 때였다. 나를 구해줄 천사가 하늘거리는 자주빛 레이스 드레스를 사락거리며, 바짝 얼어붙어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그네스? 그쪽 멋진 기사분을 나에게도 소개시켜 주지 않겠어요?" 천연덕스럽게, 나를 아그네스라고 부르며 다가선, 아그네스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나로 하여금... 내가 지금 이 순간, 왜 이런 차림을 하고, 이곳에 서 있는 가를... 그 원래의 목적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게 다.... 이 얼음대마왕 같은 자식 때문. 나는 으드득 이가 갈리는 것을 꾹 참으며, 어제 밤새도록 연습했던 가느다란 목소리를 내어 조심조심 말했다. "아, 이쪽은 Knight 데인 경. 그리고 이쪽은, 레이디 아그....." 허걱---!! 다시 한번 내 뒤쪽의 친구놈들의 얼굴이 핏기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음은, 역시 마찬가지로 굳이 돌아다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레이디. 잘 듣지 못했습니다. 이쪽 레이디의 성함이.... 아그....?" 예의바른 목소리로 다시금 물어오는 Knight 데인을 향해서, 나는 등에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웃음을 흘려 보이며 입술을 움직였다. "레이디 아그왈리아! 입니다만...." 대충 때워 붙인 그 이름에, 내 옆에서 화사하게 미소짓고 있던 아그네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꿈틀, 하는 것을 보았다. 굳이 아그네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이상한 이름을 아그네스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는.....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아그왈리아." 하지만, 아그네스에게 미안한 마음도 잠시.... 그 이상한 이름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달콤하게 발음하는 Knight 데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또다시 화르륵--- 불타 오르고 말았다. 분명, 놈의 집과 우리 집에서 혼담에 관한 얘기가 오가고 있지만, 그 대상은 바로 아그네스이지.... 아그왈리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night 데인은 나와 인사를 나눌 때보다 몇십 배는 더 예의바르고 정중하게, 내 동생의 손등에 키스를 떨어뜨렸다. '이.... 이 망할 바람둥이 자식이....!!' "두 레이디께선 친척이신가 봅니다. 이름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많이 닮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평소에 본 적 없는, 그리고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Knight 데인을 향해서, 나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내 바로 뒤에 버티고 서 있던 친구 놈들은 그런 내 기분을 용케 눈치채고는, 몰래 내 등을 꼬집어 왔다. 그 바람에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참아내느라, 나는 도저히 주먹을 날릴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파티가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던 그날. 나는 친구녀석들의 계속된 선제공격에, Knight 데인을 향해 주먹을 날릴 기회를 번번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부드럽게 미소짓는 얼굴로, Knight 데인과 포도주가 든 유리잔을 부딪히며, 나는 속으로 나즈막히 이를 갈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자식들∼, 정말로 밤길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내 등은 쉴 틈 없이 연신 따끔거리고 있었다. ************** 100만년은 족히 걸린 듯이 느껴지는 긴 훈련을 끝내고, 3주일만에 다시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잔뜩 들떠 있었다. 친구녀석들과 마음놓고 술도 펑펑 마시고, 오랜만에 여기저기 극장 구경도 다니고, 또, 못 보는 사이 자칫 잘못했으면, 금단현상까지 일으킬 뻔했던 아그네스의 예쁜 얼굴도 실컷 봐야지! 그런 생각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히죽 웃었던 때가 바로 어제. 지금 내 눈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져 오는 것은, 꿈에 볼까 무서운, Knight 데인의 미소짓는 얼굴이었다. "혹시.... 어디 몸이 불편하신 겁니까, 레이디 아그네스?" 나는, 부드러운 눈동자로 그렇게 점잖게 물어오는 Knight 데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쿡--- 찍어서는 멀찍이 밀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해, 그를 마주보며 어색하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리곤, 소리 내어 아무 일도 아니다, 괜찮다는 말을 내뱉는 대신, 열심히 머리를 가로 저어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머리를 가로 젖고 있는 그 순간에도, 이 몸이 괜찮을 리 없었다. 3주 동안 내내, 지금 눈앞에서 가증스런 미소를 흘리고 있는 저 Knight 데인에게 죽기 진전까지 시달려 왔던 나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훈련의 후유증이 채 다 가시지 않은 부실한 몸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드레스와, 균형 잡기 힘든 여성용 구두를 신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그 불편한 모양세로 한낮의 공원을 산책하고 있자니.... 조금 전부터 흘러내린 땀은, 템즈강을 이루고도 남을 정도였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저기 보이는 나무그늘에서 좀 쉴까요?" 그렇게 말하며 Knight 데인이 손으로 가리켜 보이는 나무를 향해 눈을 돌리던 나는,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내 지를 뻔했다. 나더러 지금 저길 올라가라는 거냐?! 엉---?! 나즈막한 동산 한가운데 풍성한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는 커다란 나무하나가, 허망하게 커진 내 눈에 들어와 박혔다. "저곳에서 쐬는 바람이 굉장히 기분 좋답니다, 레이디 아그네스." '케엑---! 여기 바람이나, 저기 바람이나, 바람은 다 똑같은 바람이지....!!' 나는 속으로 열심히 궁시렁거리며, 앞서서 성큼 성큼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뒤로 Knight 데인의 저주스런 발소리가 들려왔다. 햇살이 좋은 오후. 보통 때였다면, 지금쯤 테라스에서 아그네스와 한창 행복한 티타임을 가지고 있을 시간인데.... 난 왜 지금, 저 재수 없는 Knight 데인과 전쟁이라도 하듯, 이 언덕길을 숨가쁘게 오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분명, 지난번 우리 집에서 열렸던 파티 때. Knight 데인이 아그왈리아의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을 빛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당장에 아그네스와 집안끼리 혼인문제가 오가는 것을 접어버리고, 아그왈리아를 찾으러 나서면 될 것을.... 저 지지리 재수 없는 딱딱한 인간인 Knight 데인은, 아그네스와의 만남을 이렇게 의무적으로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정말로 이대로, 이런 엉터리 같은 레이디인 나와 결혼할 셈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라도... 그게 집안 어른들이 원하는 일이니까?' 내가 막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바로 내 발 앞에서 엄청난 소리를 내며, 어린 사내아이 하나가 철퍼덕 엎어져 버린 것은.... 나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대자로 엎어져 있는 그 아이를 멀뚱멀뚱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건 좀 아프겠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엎어진 아이는 그 상태 그대로, 크게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아아앙----!" 일어나서 옷이라도 좀 털고, 울던가 할 일이지.... 저 흉한 포즈그대로 라면, 입안으로 흙이 한가득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텁! 나는 살며시 허리를 숙여, 꼬마녀석의 겨드랑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곤 순식간에 번쩍, 녀석을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지저분한 얼굴을 하고, 꼬마녀석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와 같은 눈 높이에서, 내 눈을 빤히 마주봐 왔다. 그런 녀석을 향해서, 나는 따끔하게 한마디를 해 주었다. "사내녀석이, 넘어진 것 정도로 그렇게 세상이 끝난 것처럼 우는 건, 보기 흉해." 때 맞춰, 언덕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어린 여자아이 하나가 걱정스런 듯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를 질러왔다. "오빠----!"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씩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거 봐, 네 녀석이 울고 있으니까, 꼬마 레이디가 걱정을 하시잖아?" 그렇게 말하며, 나는 꼬마녀석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그때까지도, 그 녀석은 마냥 멍한 얼굴로, 내 얼굴에서 자신의 시선을 거두어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뭐야? 할말 있어?" 내가 그렇게 심드렁하게 묻자, 꼬마녀석은 흠칫 어깨를 떠는 듯 하더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레이디는 그런 말 안해!!" "뭐?!"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는, 사내녀석이 어떻다든가.... 네 녀석이 어떻다든가... 하는 말은 안 해!" 그렇게 버럭 소리지르며, 꼬마녀석은 조금 전 고개를 내민 꼬마 레이디를 향해 언덕을 부리나케 달려 올라가 버렸다. 그런 꼬마녀석의 뒷모습을 창백해진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말고, 나는 그제서야, 어느샌가 까맣게 잊고 있던 존재를 떠올리곤....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얼굴이라기 보다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Knight 데인이 보였다. "굉장한 힘이신데요, 레이디 아그네스?" Knight 데인은 그렇게 조용히 말했지만, 그 말투는 그다지 놀린다거나,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는 아니어서, 굉장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저, 저기 그건....." 당황해서 뭔가를 더 말하려는 나에게, Knight 데인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예전에 들었을 때보다.... 목소리가 많이 낮아지셨구요." 이젠 아예 하얗다 못해서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하고, 나는 열심히 뭔가를 버벅거렸지만, Knight 데인은 그저 예의바른 말 한마디로, 내 정신없는 행동을 순식간에 멈추었다. "그렇게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아그네스. 당신이 매력적이란 뜻이었습니다." ************** "그렇게 당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디 아그네스. 당신이 매력적이란 뜻이었습니다." 나는 느끼하게 목소리를 내리깔며, 지난 주말, 공원 산책 중에 Knight 데인이 나에게 했던 말을 흉내내었다. 그 순간, 한창 시끌벅적한 가게 한 가운데서, 오직 나와 내 친구녀석들이 둘러앉아 있는 테이블에만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정적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도 들키지 않은 게 신기하다! 그 이후엔 뭘 했냐? 뭔가 더 뽀록 날 만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그 무거운 침묵을 뚫고 간신히 빠져 나온 친구녀석의 의심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신이 나서 술을 벌컥 벌컥 들이키다 말고,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댔다. "날 뭘로 보냐?! 내가 들킬 것 같아?! 내가 얼마나 신경 써서,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초 평범한 이야길 나누느라 고생했는데..." "이야길 했다고----?! 무슨 이야기?!!" 펄쩍 뛰며, 물어오는 친구 녀석들을, '이것들이 오늘 갑자기 다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나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특별한 얘긴 안 했어. 뭐.... 볼폰이나, 베어울프 얘기정도?" "그... 그게... 보통 레이디들이 초 평범하게 하는 얘기냐, 임마---?! 그런 기사 무용담만 가득한 얘기들을 레이디들이 좋아하느냔 말이다!" 버럭 고함을 내지르는 친구녀석들을 귀찮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나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손짓을 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 류안표 에로버전으로 각색했으니까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여유있게 웃어 보이는 나를 향해, 친구녀석들은 '이젠 다 망했다!'는 실례의 말들을 무례하게 연신 중얼거렸다. 그런 녀석들을 노려보며, 다시금 잔을 다 비우고 나는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미리 계획했던 대로, Knight 데인이 우리 아그네스와 혼인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본인의 입으로 꺼내지 않은 이상.... 이렇게 된 거, 실컷 놀려먹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해지지 않겠어? Knight 데인은, 아그네스의 모습을 한, 이 나의 매력에 정말로 푹 빠진듯한 모습이었으니까, 말이야! 우하하하----!" 자신만만한 내 모습을 바라보며, 친구녀석들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왔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내가 보여준 그 레이디답지 않은 힘이나, 저음의 목소리도, 매력적이라고 말할 정도면.... Knight 데인은 충분히 나에게 콩깍지가 씌인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두고보라고! 확실하게 Knight 데인에게 큰 걸로 한방 먹이게 될테니까!!" 그리고, 친구 녀석들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그날, 바람이 시원한 언덕 위에서 내 그 썰렁한 각색본 베어울프를 들으며, 크게 소리까지 내어 웃던 Knight 데인의 모습은.... 그를 속이고 있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양심에 찔리는 바가 없다고, 자신하던 나까지도, 한순간 가슴 한켠이 욱씬해질 만큼, 꾸밈없이 솔직한 모습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Knight 데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늘 재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던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부드러운 바람이 부는 언덕의 시원한 그늘에 앉아서, 슬쩍 훔쳐보는 그의 옆얼굴은, 확실히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Knight 데인의 차갑고 인간미 없던 얼굴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생전 처음 들어보는 그의 유쾌한 웃음소리는, 나로 하여금 여태까지 그 긴 훈련기간동안, 내가 그의 어떤 모습만을 보고 있었던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들었다. 평소엔 늘 이런 모습인 걸까....? 이렇게 세심하게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렇게 다정하게 배려하는 말을 건네고... 이렇게 정말로 즐거운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을 수 있는 사람. 그것이 원래의 Knight 데인인 걸까? "큰 걸로 한방이라.... 어떤 식으로 제게 크게 한방을 먹일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Knight 류안." 언덕 위에서 바람을 맞으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 올리던 Knight 데인의 옆모습. 그 모습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 내 앞으로, 갑자기 진짜 Knight 데인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우왓----?!" 의자를 뒤로 죽--- 빼며, 뒤늦게 화들짝 놀라는 나에게, Knight 데인은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당신이 한방이라고 소리지르는 목소리가 예의를 모르고 이 한밤중에, 길 저편까지 넘쳐나더군요. 그 한방이란 것이 얼마나 기사다운 예의를 갖춘 것인지 무척 궁금합니다, Knight 류안. 물론, 아직 훈련생답게, 저에게 정식으로 연습경기라도 걸어오실 생각이시겠지요?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그 외의 다른 사사로운 승부나, 결투는.... 훈련생과 교관인 저 사이에서는 이뤄져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아니면.... 달리, 제게 한방을 먹일 비겁한 수법을 생각해 두셨다거나...?" 보통 때 훈련장에서 익히 듣던,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그 목소리에, 나는 있는 힘껏 꽥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 누가, 비겁한 수법을 쓴다는 겁니까---?! 저도....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Knight 데인에게 연습경기를 정식으로 신청할 생각이었단 말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가볍게 말을 받으며, 눈앞의 Knight 데인이 살며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보일듯 말듯한 비웃음을 보면서, 나는 내가 Knight 데인의 계략에 속아넘어갔다는 생각보다는, 배신을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먼저 떠올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비웃는 지금의 이 모습에... 어쩌면, 그날 언덕에서 보았던 Knight 데인의 모습보다도, 지금 눈앞의 이 모습이, 진짜 Knight 데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주 짧은 한순간이나마, 그를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내가 정말 바보 같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깜빡 속아넘어가고 말았던 것일까? 늘 이런 Knight 데인의 모습을 지켜봐 왔으면서도..... ************** 광장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내 주위로 동기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는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다들 한마디씩 건넸다. "힘내, Knight 류안!" "우리 중에 Knight 데인을 상대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Knight 류안 밖에 없을 거라고 쭉 생각해왔었지." "Knight 데인도 결국은 인간이라고! 언제까지나 승승장구 할 순 없지!" "잘해봐, Knight 류안! 남는 건 힘밖에 없잖아?!" "나, Knight 류안에게 걸었다고!" '....내기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 상대는 Knight 데인이라고---!' 하는 말을 눈빛으로 강렬하게 내 쏘아 주었지만, 잔뜩 들떠 있는 녀석들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 쉬며, 나는 움직이기 싫은 발바닥을 바닥에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 광장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미리 도착한 Knight 데인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나보다 훨씬 더 강인한 어깨와 팔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젊은 나이에, 신참 Knight 들의 교관을 할 정도로, 그 실력은 성안의 누구나 다 알고 있고, 하물며... 세살 박이 어린애조차도, 엄마 아빠 다음으로, Knight 데인의 이름을 중얼거릴 정도였다. 성 최고의 기사이며.... 이 세기 최고의 기사로 칭송 받는 사람....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칼을 들어올렸다. 바닥을 힘있게 디딘 발바닥이 긴장으로 찌릿거렸고, 칼을 움켜쥔 두 손바닥에선 땀이 흥건하게 고였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Knight 류안?"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그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차갑고, 무뚝뚝하고, 융통성 없고, 고지식하고, 인간미 없는, 얄미운 책략가. 내가 지금 이 순간에 무찔러야 할 악당. "다른 Knight들이 입모아 칭찬하는 당신의 그 파워 파이터로서의 힘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Knight 류안." "저 역시, 사람들이 입모아 칭찬하는 Knight 데인의 그 섬세한 기술들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머릿속엔 분명, '잔챙이 같은 기술'이란 단어가 두둥실 떠올라 있었지만, 나는 '섬세한 기술'이라는 말을 이를 갈듯이 입 밖으로 툭 던져놓았다. Knight 데인의 칼끝이, 나를 향해 들어올려지자, 나는 한줄기의 한기가 내 등을 달려 내려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를 악물고,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죽을 땐 죽더라도.... Knight 데인의 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콧대는 내 손으로 베고 죽어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챙---!!! 가볍게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를 시작으로, 광장 안 가득히, 사람들의 잔뜩 흥분한 고함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 광장 한가운데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흥분해서 목청껏 소리 높여 응원을 해 대고있던 사람들은, 다들 언제부턴가 조용해져 있었다. 그것도 목젖이 다 내보일 정도로 입을 쩌억 벌린 채로 말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그렇게 혼이 다 나가버린듯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눈동자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언제부터 였을까? 그들이 숨을 죽이고, 내 움직임을 따라서... 정확히는, 나와 Knight 데인의 움직임을 따라서, 그들의 시선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은? 확실하진 않지만,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무식한 휘두르기를 막아낸 Knight 데인의 칼이, 내 칼과 함께, 광장 저편 한쪽 구석으로 날아가 버린 이후로.... 막무가내로 주먹을 쥐고 덤벼드는 나에게 휩쓸려, Knight 데인이 바닥으로 쓰러지면서부터.... 정확히는, 그때 바닥으로 쓰러지던 Knight 데인이 나와 마찬가지로 주먹을 움켜쥐고, 나에게 그 주먹을 날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때부터, 사람들은 멍청한 얼굴로, 저렇게 입을 헤 벌리고서, 이쪽을 말릴 생각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흙먼지가 마구 날리는 광장 바닥을 나뒹굴면서, 나와 Knight 데인은 맨주먹으로 서로를 치고 받고 싸우고 있었다. 기사로써의 예의나, 검에 대한 예의, 동료에 대한 예의.... 그딴 것들은 몽땅 내다 버린지 오래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바로 내 눈앞에서 파이팅 포즈를 잡고있는 적뿐이었다. 적이 있다면, 싸워야 했다. 칼이 없다면, 주먹으로라도.... 그것은 명예로운 기사로서는 무식한 짓거리일지도 몰랐지만.... 사나이로서는 자신의 두 주먹으로 싸우는 것만큼, 야생의 투쟁 본능을 자극하는 것은 없었다. 실제로 주변은 조용했지만, 나는 그보다 훨씬 더 조용한 공간에, Knight 데인과 단 둘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Knight 데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느낄 수가 없을 만큼, 나는 이 싸움에 몰입해 있었다. 하물며.... Knight 데인의 그 장난과도 같은 칼 놀림에, 여기저기 긁힌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Knight 데인의 눈빛 역시, 보통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눈빛이,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내 움직임 하나 하나에 예리하게 촉각을 바짝 세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나에게 이기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등등을 말해주고 있었다. 보통 때의, 너무 차분하다 못해서 차갑게 느껴지던 눈빛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마음에 와 닿는 그 뜨거운 눈빛에, 나는 오싹한, 두려우면서도 기분 좋은 한기를 다시금 느끼고 있었다. 대체 이 사람은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최고의 기사로서, 교관으로서, 그 인간미 없는 그 차가웠던 얼굴 아래.... 얼마만큼 더 많은 얼굴들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여성들에게만 보이는 예의바르고 부드러운 얼굴. 솔직하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는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얼굴. 절대로 지고싶지 않다는 투쟁본능을 여실하게 드러낸 얼굴. 그 중에, 어떤 것이 바로 진짜 당신의 얼굴일까? 퍼억---!! 잠깐 숨을 고르고 있는 사이, Knight 데인의 주먹이 사정없이 내 볼에 작렬했다. "퉤---!" 내가 가볍게 뱉어낸 침에는, 붉은 색이 잔뜩 섞여 있었다. 조금전의 그 한방으로 입안이 터진 모양이었다. 제길....! 나는 가볍게 볼을 어루만지다, 다시금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Knight 데인의 앞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곧이어 도끼로 나무를 베는 것과도 같은, 퍽퍽 하는 무시무시한 소리가 조용한 광장 안을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주먹으로 치고, 팔꿈치로 찍어 내리고, 무릎으로 찍어 올리고, 발로 차고.... 눈앞의 상대를 치는 것만으로도 급해서, 방어는 제대로 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Knight 데인과 나는, 말려주는 사람이 없는 연습장 한가운데서 밤새도록, 그렇게 둘 다 걸레가 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다. ************** "싸우고 나서 친해지는 건, 애들에게나 해당되는 얘긴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렇게 비꼬듯이 이야기하는 친구 놈을 향해, 팩--- 고개를 돌리며, 나는 살벌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금방이라도 눈이 놀아가 버릴 듯, 강렬하게 노려봐 오는 내 눈빛에, 친구 녀석은 당황해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마구 내 저어 보이며,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연습 시합을 하고 나서는, 이렇게 술자리를 가지는 것이 인간관계에 좋다∼, 이 말이었지. 뭐, 달리.... 네 녀석이 싸우고 나서, 갑자기 Knight 데인에게 술을 따라주고 친한 척 하는 폼이 어린애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하하....." 정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정말이지 그냥 듣고 넘길 수 없는 건방진 말을 은근슬쩍 내뱉는 그 녀석을 향해, 내가 한쪽 눈썹을 쓱 들어올리자.... 녀석의 양쪽에 있던 두 친구들이 그의 허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댔다. 그리고 다른 한 녀석이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에, 너랑 Knight 데인이 싸우는걸 보고, 확실히 깨달았지. 너를 적으로 돌려서는 절대 안되겠다는 걸 말이야. 정말이지... 북부 야만족 놈들이 봤더라도 울고 갈 만큼 거친 싸움이었어." '거칠다 = 남자답게 멋있다' 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박아넣고 사는, 나를 노리고 한 말인 듯 했지만.... 불행하게도, 그 말은 내 옆자리의 Knight 데인을 싸아---하게 얼려놓았다. 기사의 싸움이, 야만족의 싸움과 닮았다는 얘기를 듣는 것이, 예를 숭상하는 기사에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어느샌가 거침없이 차가운 오오라를 내뿜는 Knight 데인의 눈치를 보며, 다른 녀석이 버럭 소리를 지르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류안, 네 녀석이랑 싸우기 무서워서, 어디, 레이디 아그네스를 넘볼 생각이나 하겠나?.... 이 말이지." 싸움 이야기에서, 아그네스의 이야기로, 다시금 주제를 바꾸기 위해 진땀을 흘리는 친구 녀석의 노력은 정말이지 눈물겨웠다. 하지만.... 이번엔 Knight 데인을 대신해, 내가 고오오--- 하는 미묘한 울림을 내며 끓어올랐다. "나랑 싸우는 것 정도를 무서워하는 그런 겁쟁이 놈이, 감히 우리 아그네스를 넘봐---?! 웃기지 말라 그래! 적어도 나 정도는.... 아니, 나보다 더 진심으로 우리 아그네스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난 절대, 용납 못해!!!" 두런두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술집 안의 기분 좋은 분위기를, 내 목소리가 순식간에 망쳐놓았다. 하지만, 아그네스와 관련된 일이라면, 무조건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나로서는, 내가 그 좋은 분위기를 부셔놓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그렇게 씩씩거리고 있는 내 어깨에, 툭--- 가벼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언제나 악사의 손과 같다고 생각했던 그 하얀 손은, 나와의 싸움으로 여기저기 찢기고, 긁히고,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손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이렇게 뭔가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아는 손이라면.... 이런 손이라면, 우리 아그네스를 맡겨도 좋을지도.... 라고, 나는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Knight 류안은 동생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나 봅니다. 하긴.... 레이디 아그네스만큼 아름다운 동생이라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며, Knight 데인은 나를 향해 가볍게 미소지어 보였다. 교관으로서는 여태까지 단 한번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던 미소였다. 지금 이 순간, 여기는 훈련장도 아니었고, 훈련 시간도 아니었다. 지금 Knight 데인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레이디 아그네스의 오빠인 나였다. 왠지 모르게 한순간, 가슴 한가운데를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좋을 리 없는 그 이상한 기분을 숨기려, 나는 얼른 내 손에 쥐어진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자 그럼, 오늘밤은 아름다운 우리 아그네스를 위하여---!" 내 뒤를 이어, 친구 녀석들이 후다닥 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Knight 데인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내 잔 바로 옆으로, 자신의 잔을 들어 올려왔다. ************** 왜 예전엔 몰랐을까? Knight 데인, 그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술을 마시고, 취하고, 기분 좋게 이야기를 떠들어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독한 싸구려 포도주에,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 Knight 데인의 눈을 마주보며 유쾌한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아마 Knight 데인은 모르실 겁니다. 단순한 연습이라도 좋으니, 당신과 칼끝을 겨뤄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내들이, 이 성안에 얼마나 많은지 말입니다. 세네 살 난 어린아이에서부터, 이제 곧 퇴직해야할 나이든 노기사에 이르기까지.... 남자라면 아마 모두들 그럴 겁니다." 혀 꼬부라진 목소리를 내는 내 목소리는, 내가 이미 충분히 마실만큼 마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아까운 포도주가 넘실거리는 잔을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바로 옆자리의 Knight 데인이 턱하니, 내 손길을 막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곤, 살며시 미소지어 보이며 중얼거렸다. "저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에?" 나는 Knight 데인이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멈칫하는 사이에, 갈증이 나 마른 입술을 냉큼 포도주로 적셨다. "어렸을 때부터, 줄곧 당신 이야기를 들어왔으니까요. 10살도 채 안된 어린 나이에, 성안의 모든 나이트들이 혀를 내두를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일까? 어느 정도의 실력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성격의 사람일까? 혹시나... 만날 수 있게 된다면, 실력을 겨뤄 볼 수 있을까? 무슨 말을 제일먼저 하고, 무슨 말을 제일 먼저 듣게될까? 사실... 어린 시절, 아버님으로부터 들어왔던 당신은, 내 꿈이고, 이상이었습니다. 야만인처럼 굴었던 이 내가,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꿀 정도로 말입니다." Knight 데인은, 놀란 듯한 눈을 천천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놀란 듯해 보이는 그 눈이, 그 순간의 나에게는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다. 그래서, 그 모습이 마치 현실의 모습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졸리는 눈을 가볍게 비비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기사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훈련장에서 처음 만났던 날.... Knight 데인, 당신은... 마구 두근거리고 있던 나에게 말했습니다. 가차없이...." "너, 바보냐...." 그때의 그 강력한 억양과 진심이 잔뜩 배어나는 '너, 바보냐---?!' 대신, Knight 데인은 속삭이듯 조용한 목소리로, 그 말을 내뱉고 있었다. "충격이었다구요.... 가장 만나고 싶었던 사람, 가장 존경하던 사람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 '바보냐?'라니...." 알콜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유쾌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하강곡선을 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듯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정말로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글썽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얼른 Knight 데인의 눈을 피해 탁자위로 푹--- 얼굴을 묻어버렸고.... 잔뜩 취한 친구 녀석들은,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자기들 중에서 아그네스가 진짜로 좋아하는 녀석이 누구인가?!를 놓고 피튀기는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친구녀석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점점 귓가에서 멀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서서히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따스한 뭔가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내 손등에 가볍게 와 닿았다. 머리를 들어올리려고 해 보았지만, 술에 폭삭 젖어버린 머리는 너무나 무거웠다. 가볍게 맞닿아 있던 그것은 천천히 내 손등을 타고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리고 그렇게 내 손목에 머무르게된 그 온기는, 따스하게 내 손목을 폭, 감싸쥐어 왔다. 그와 동시에 귓가에 뭔가가 나즈막히 속삭여 졌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Knight 류안, 그때도 당신이 바보라는 이유를, 말해줬던 것 같은데요? 그렇게 무리하게 힘을 써서, 검을 휘두르면, 이 가느다란 손목이 위험하다고 말입니다...." ************** '미쳤다....' 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Knight 데인과 밤새도록 술을 퍼 마시고, 술에 취해서, 그 Knight 데인에게 술 주정을 하다니!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그날 밤 내가 그에게 어렴풋이 뭔가를 잔뜩 늘어놓았다는 생각은 드는데... 정확히 그것이 어떤 이야기들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는 것이었다. '미쳤다, 미쳤어! 미친 거라고!' 그렇게, 속으로 열심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상상을 하다말고, 나는 내 이름을, 정확히는 '아그네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얼굴로 활짝 미소지으며, 아래로 푹 떨구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레이디 아그네스?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어오는 Knight 데인을 향해 괜찮다는 말을 전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엄청 뜨끔했다. 얼굴이 평소보다 훨씬 더 창백해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 채 다 사라지지 않은 얼굴의 멍을 감추기 위해, 오늘따라 진하게 분칠을 한 탓이었다. 게다가.... 그날, Knight 데인과 함께 술을 마신 날 이후로는, 내가 했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 그 술 주정의 내용이 신경 쓰여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던 탓도 있고.... "게다가, 오늘따라 너무 말이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늘 하시던 재미있는 각색 극 얘기도 하지 않으시고...." 언제는 내 각색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선정적'이라느니, '저질스럽게 무단 각색'을 했다느니.... '존슨경이 무척이나 기뻐하겠다'는 등의 비꼬는 말로, 사람 속을 확---, 뒤집어 놓더니.... 같은 내용이라도, 내가 아닌 아그네스가 하는 거라면, 어떤 이야기라도 다 재미있고, 들을만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일까? 아니, 정확히는 진짜 '아그네스'가 아니라, 단순히 '아그네스로 변장한 나' 이지만..... 살다살다 자기 자신에게 이런 분노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한심한 자신을 향해 말했다. 이렇게나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는 것은, 단순히 이 여장차림 때문이라고. 여자 옷을 차려입고, 여자처럼 행동하고, 여자처럼 말하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생각까지도, 여자처럼 하게된 것일 거라고. 그러니, 이딴 여장 따위, 지금이라도 당장 때려치워 버리면.... 더 이상 이런 이상한 기분에 휩싸일 일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Knight 데인이 어떤 사람인지는 그 동안 충분히 알았다. 훈련장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그의 또 다른 모습들도 많이 보았고... 또, 그런 그의 또 다른 모습들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런 그를 신랑감으로써 선택할 것인가, 아닌가는 단순히 진짜 아그네스가 결정할 몫이었다. '짜잔---!!' 하고 소리지르면서 치마라도 들어올려야 하나? 쿡....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묻어났다. Knight 데인은 내가 진짜 아그네스가 아니란 걸 알면 어떤 반응을 내 보일까? 남자이고.... 또,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교관 생활 최대의 오점인 나, Knight 류안이란 걸 안다면 말이다. 엄청나게 놀라서 눈을 크게 뜨겠지? 심장마비나, 뭐... 그런 걸로 갑자기 쓰러지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느닷없이 주먹이 날아오는 것은 아닐까? 저번에 맞아보니, 섬세하게 생긴 주먹 주제에, 굉장히 아팠었는데....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한쪽 입술만 가만히 접어 올리며, 나를 비웃을까? 지독히도 차가운 눈으로 거침없이 나를 비난하면서.... 다시 한번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의 술은 이미 오래 전에 다 깼음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영문모를 눈물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제길----!!! 나는 길게 혀를 찼다. 당장... 일분, 일초라도 빨리, 이 여장 차림을 때려 치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앞서서 가로수 길을 걸어가다 말고, 내 뒤를 따라 걷고 있는 Knight 데인 쪽으로 확 돌아섰다. "Knight 데인!! [ The Silent Woman ]을 아십니까?!" 아무리 이제 곧 정체를 밝힐 계획이라지만.... 너무나도 씩씩한 내 목소리에, Knight 데인뿐만 아니라, 나 역시도 깜짝 놀랐다. "모로세르크경의 에피코엔느는.... 윽---!!!" '남자였다'는 걸 아느냐고, 물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등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팔이 내 목을 확--- 조여왔다. '이게 뭐야?' 라고 멍하니 생각하며, 내가 내 목에 둘러진 두꺼운 근육질의 시커먼 팔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레이디 아그네스---!" 당황한 Knight 데인의 목소리가 인적이 드문 가로수 길을 가득 울리고, Knight 데인이 칼을 뽑아드는 소리가, 내 머릿속으로 파고들어 위험신호를 울렸다. "칼을 버려! 여자가 위험하다고, 기사양반∼" 느글느글한 목소리와 함께, 기분 나쁜 미지근한 숨결이 내 목덜미에 와 닿았다. "네 녀석들도 남자라면, 여자는 놔줘라! 네 녀석들이 노리고 온 것은, 그 레이디가 아니라, 나다! 그렇지?!" Knight 데인의 그 말을 들으며, 내 목을 붙들고 있는 덩치가 피식.... 웃음을 흘린 것은, 거의 나와 동시였다. 말투를 들어보니, 딱 북부 야만족의 첩자였다. 그들은 여자 남자를 가릴 녀석들이 아니었다. 듣자하니, 그쪽에선 여자들도 기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쪽 여자들은, 이런 불편하게 꽉 죄고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드레스대신, 남자들처럼 바지를 입고.... 다소곳하게 앉아서 온실 속의 화초가 되는 법을 배우는 대신, 주먹과 칼 쓰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그런 세계에 익숙한 그들로선, 진정한 남자라면, 당연히 여자라고 해서 놓아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적이었다. "여자의 목이 비틀어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칼을 버리라고 했다, 기사양반∼!" Knight 데인은 '칫....' 하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리며, 할 수 없다는 듯, 칼을 바닥에 떨구었다. 그러자, 나를 붙들고 있는 덩치 뒤의 녀석들이 우르르.... Knight 데인을 향해 일제히 몰려갔다. 상인으로 가장해서, 국경을 건너기 위해서는 칼을 소지할 수 없었을 테고.... 몸에 별다른 무기도 달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맨손이라 할지라도.... 하나, 둘, 셋..... 여덟이다. 여기 내 목을 조르고 있는 녀석까지 치자면, 아홉. Knight 데인이 혼자 상대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등뒤의 녀석을 어떻게 떼어낼 것인가를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할짝---- 뒤에서 뭔가 꺼림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뭔가 기분 나쁜 물컹한 것이 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헤헤, 이곳 여자들은 죄다 나긋나긋하고, 부드럽다지? 특히나 너는 저 Knight의 여자니.... 최고의 품질이겠군.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그 맛이나 한번 볼까?" 품질이 뭐 어째....? 맛을 어떻게 한다고....? 더 이상 생각하고 어쩌고 할 것도 없었다. 나는, 녀석이 내 뒷목을 맛보는 사이, 잠시 헐거워진 녀석의 손을 턱하니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우두두두둑----.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있는 힘껏 녀석의 팔을 비틀어 빼 주었다. 뼈가 뒤틀리는 엄청난 소리에 뒤이어, 조금 전 팔이 기이한 모양으로 뒤틀린 녀석이 숲이 떠나가라 비명을 꽥 내 질렀다. '그거 고맙군....' 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전의 그 비명소리에, Knight 데인을 후려치고 있던 놈들이, 화들짝 놀라서 움직임을 멈추고, 내 쪽으로 돌아봐 주었다. 그리고, 그 째지는 비명소리를 듣고, 우리편이 와 준다면, 더없이 우리에게는 좋은 상황이 되는 것이었다. "뭐.... 뭐야?!" "이곳의 여자들은, 전투능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야만족 녀석들이 멍청하게 그런 말들이나 읊고 있는 사이, 나는 허리를 숙여, 치마를 살며시 걷어올리고는 신발을 조심스레 벗어들었다. 그리곤, 양손에 들어올린 그것을.... 멍하니 내 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바보 놈들을 향해 있는 힘껏 내던졌다. 아무 놈이나 맞아라, 하는 생각으로 홱--- 내던진 것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앞에 놈이 갑자기 피하는 바람에, 미처 그 구두가 날아오는 것을 보지 못한 그 뒤에 놈 중의 한명이 이마에 구두를 맞았다. '헤에.... 멍청하네. 저런 놈들이 있으니까, 야만족이 다들 무식하게 힘만 쎄다는 소리를 듣는 거 아냐?!' 혹시나 누군가 그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면, 저 녀석은 대체 어느 편이야?! 라고 의심하기 충분한 소리를 겁도 없이 속으로 떠들어대며, 나는 천천히 Knight 데인을 향해 걸어갔다. 맨발이 되어, 그전보다 훨씬 걷기가 편했던 나는, 절대 여자라면 그렇게 걷지 않을 걸음걸이로, 어슬렁어슬렁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넌, 뭐야?!" 당황해서 그렇게 물어오는 바로 코앞의 야만족 녀석을 향해서, 나는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에피코엔느다!" "그, 그게 뭐냐----?!" '에피코엔느'를 이 나라의 숨겨놓은 인간 비밀병기쯤 된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것인지... 야만족 녀석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어왔다. 나는 그런 녀석들을 향해 쿡... 소리내어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에피코엔느도 모르다니.... 존슨경이 아시면, 무척이나 기뻐하시겠어!"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 앞에 산처럼 우뚝 솟아있는 이의 무릎께를 있는 힘껏 걷어차 버렸다. 산만한 덩치가 순식간에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2대 7의 불리하지만, 영 승산이 없지는 않은 싸움이 시작되었다. ************** "류안---!!!" 군영 내에 있는 의무실의 나무문이 벌컥 열어붙여지고, 내 이름을 부르는 우렁찬 목소리들이 의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현재 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다른 환자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문을 박차고 의무실로 뛰어든 친구 녀석들은, 이곳이 의무실이라는 것, 환자는 무조건하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원래 자신들의 목소리보다도 훨씬 오버된, 큰 목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괜찮은 거야?!" "산책한다고 나간 녀석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람들 말로는, 너랑 Knight 데인이 북부 야만인들을 잡았다고 하던데, 사실이냐?!" 이미 온몸에 난 상처들은 모두 치료를 완료한 상태로, 나는 의무실의 조그만 창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여유 있게 창 밖을 내다보며 쉬고 있던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 만해도,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중이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방해하고 침입해 들어온 친구 녀석들이 미웠다기 보단, 이상하게도.... 여태껏 그 어느 때보다, 녀석들의 존재가 반가웠다. 그랬기에, 나는 빙긋 웃는 얼굴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 꼴이 대체 뭐야---?!" 돌아보기가 무섭게, 친구 녀석들이 시퍼런 얼굴로, 일제히 버럭 고함을 내질러왔다. "이 꼴이 뭐 어때서?" 나는 씩--- 미소지어 보이며, 당당하게 양팔을 벌려 보였다. 쫙 벌린 양팔의 소매뿐만 아니라, 가슴 쪽이며, 아래쪽의 치마까지도 온통 너덜너덜하게 찢겨나가 있었다. 특히 가슴 쪽은, 바람이 불면 홱 날아갈 듯한 조그만 천 만이 남아서, 아슬아슬하게 납작한 가슴을 가리고 있었다. 친구녀석들은 그 모습에 한숨을 내 쉬며, 절망적으로 물어왔다. "그 꼴로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응. 안돼냐?! 지나가는 녀석들마다 휘파람 불고, 손 흔들고 난리 났었어. 이거, 꽤 재밌더라고."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덤덤하게 말했지만, 친구녀석들은 조금 전 보다 더욱 시름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여장이라니.... 다들 네가 미쳤다고 생각했을 거다." "아아, 지금쯤이면, 성안 곳곳에 소문이 다 퍼졌겠지?" "그럼, 아그네스의 얼굴은 더 이상 볼 수 없는 건가?" 마음 같아서는, 내 걱정보다, 아그네스를 못 보게 될 것을 더 걱정하는 녀석들이, 조금 더 어둠 속에서 발버둥치는 꼴을 보고 싶었지만... 나는 한번 봐준다는 심정으로, 유쾌하게 입을 열었다. "다들 내가 여장한 걸, 이번 순찰 작전의 일부라고 생각하던 것 같던데? Knight 데인만 빼고 말이지...." 그 말에, 만세를 부르며 기뻐할 줄 알았던 친구 녀석들이, 그저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봐 왔다. 그리곤, 어울리지 않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Knight 데인에겐, 이번 싸움 때문에 들키게 된 거야?" 친구녀석들의 심각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냥 환하게 웃는 얼굴로, 건들건들하게 대답했다. "응. 재미없게 됐지?! 쳇---!! 내가 아그네스가 아니라, 류안이라는 걸 멋지게 밝히는 게, 이 극에서의 핵심인데 말이지.... 그놈의 야만족 녀석들 때문에, 다 말아먹었다고! 그놈들 때문에, Knight 데인의 놀라 기절초풍할 듯한 얼굴도 못보고 말이야! 나는 그런 Knight 데인의 얼굴을 보면서, 통쾌하게 웃어주지도 못하고 말이야!" "류안...." 걱정스러운 듯,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부르는 친구 녀석들의 목소리에, 나는 왠지 모르게, 뭔가가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눈물이라는 것은, 따스한 물방울 하나가, 내 손등위로 툭--- 떨어지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느샌가 내 발끝으로 흘러내려 있는 Knight 데인의 망토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간단하게 치료를 끝낸 Knight 데인이 다른 수기사들과 함께 급하게 이 의무실을 빠져나가며, 내 드러난 어깨위로 떨구어 주고 간 것이었다. 그가 어떤 뒷모습을 하고 내게서 멀어져 가는지를 지켜보고 싶었지만.... 망토의 감촉을 느끼며, 내가 서둘러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Knight 데인이 의무실을 다 빠져나가고 난 뒤였다.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장님이 아닌 이상,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바보가 아닌 이상... 그는, Knight 데인은 내가 아그네스가 아니라, Knight 류안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것도 내게 묻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망토까지 덮어주었다. 만약에, 나였다면.... 나였다면, 그 사실을 아는 즉시, 야만족이 아니라, 나를 속인 그 인간에게로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침착하고 냉담하게, 그는 나에게 예를 차렸다. 나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 내가 자신의 눈앞에서 그 어떤 엉뚱한 짓을 하든, 그것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자신이 놀라거나, 화가 날 리 없다는 듯한 태도.... "윽.....!" 나는 내 손 가득, Knight 데인의 망토를 꽉 움켜쥐고서, 잔뜩 억눌린 소리를 내며, 울음소리를 삼켰다. 하지만, 눈물만은.... 잔뜩 힘을 줘, 새 하얗게 변한 내 손등위로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광장 안을 울리고 얼마 안 있어, 한창 훈련 중이던 기사들은 일제히 칼을 집어넣고, 우르르 훈련관에 위치한 식당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있었던 북부 야만족 사건으로, 기본체력과 격투술의 중요성이 부각된 탓에, 기본 훈련의 강도가 더욱 세어진 듯 했다. 체력 단련의 일환으로 광장을 달리는 도중에, 쓰러지는 사람도 여럿 나온 걸 보면....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흙바닥 위를 뒹굴며, 조금이라도 더 움직였다간 죽을지도 모른다고 떠벌리던 동료들은, 밥 냄새를 맡고 식당으로 뛰어갈 때만큼은, 그 어떤 장사들 보다 쌩쌩한 모습으로,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 굉장한 동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소리내어 웃고 있다말고, 나는 뒤늦게 검을 챙겨 넣었다. 흙먼지 투성이가 된 옷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어 번 두드리며,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없는 텅 빈 광장을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원래부터 늘 친구들에게서, '거들먹거린다' 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여유 있는 걸음걸이였지만.... 밥 생각이 별로 없었던 나는, 평소보다 배는 느린 걸음걸이로, 식당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돌계단을 다 내려가자, 음식냄새가 보다 더 선명하게 코끝에 와 닿았다. 그리고, 바로 눈앞의 모퉁이 하나만 돌면, 활짝 열어붙여진 식당 문이 보일 게 분명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나는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빨라진 걸음걸이로, 막 모퉁이를 돌려던 참이었다. 턱----!!! 불현듯 등뒤에서 날아든 손이 덥썩, 내 뒷덜미를 움켜쥐고는 나를 뒤로 있는 힘껏 잡아 당겼다. '이번엔 대체 어떤 놈이, 팔을 비틀리고 싶은 거냐?!' 나는 무지막지한 힘에 주욱--- 끌려가면서도,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식당이 있는 복도 바로 옆의, 기둥에 가려져 어두운 복도로 끌려 들어간 나는, 그대로 차가운 돌 벽으로 밀어붙여졌다. 코끝에 와 닿는 선명한 돌이끼 냄새를 맡으며, 나는 내 등을 온 몸으로 누르고 서 있는 자식의 면상이 반질반질해 질 때까지, 반드시 이 돌 벽에 문질러 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를 으드득 갈며,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하자는 거야?! 엉?!" "제대로 소독은 했나?" 내 무시무시한 협박조의 말에 뒤이어, 등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훨씬 더 무시무시하게 어두운 복도를 음산하게 울려왔다. 나는 그 차갑고 인간미 없는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Knight 데인!" 내가 정답을 외침으로 해서, 이 범인 맞추기 게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내 등을 온몸으로 찍어누르고 있던 이는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닌가.....?' 잠시 혼란스러워진 머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Knight 데인의 것임이 확실한 목소리가, 이번엔 내 바로 왼쪽 귓가에서 들려왔다. "상처는 모두 제대로 소독을 했냐고 물었습니다, Knight 류안." 나는 꽉 잡힌 몸을 꼼짝도 하지 못한 채, 가까스로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소독 따위야 이미 오래 전에 다 끝냈습니다요! 그러니, 사람을 이렇게 무슨 병원균이나, 죄인 취급은 하지 마시죠!" 힘 하면, 나 Knight 류안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으로 힘을 봉쇄 당하고 벽에 짓눌려진 나는,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이 비굴한 상황에, 마음속으로 칼을 갈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럼, 마지막으로 여기만 확실하게 소독을 하면 되겠군..." 등뒤에서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이 들려온 것과, 목 줄기에 따스한 입김이 살며시 와 닿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에엑---?!" 화들짝 놀라서, 허리를 움찔거리는 나를, Knight 데인은 더욱 힘껏 벽으로 몰아붙였다. "큭....!" 나즈막하게 신음을 울리는 내 목에, 부드럽고 따스한 뭔가가 선명하게 닿아 왔다.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던 촉촉한 것이, 내 뒷 목줄기를 따라 쓱..... 미끄러졌다. "우.... 우와악---! 읍!!!" 고함을 내 지르려는 내 입을 커다란 손이 턱하니 가로막아 왔다. "조용히 하세요, Knight 류안. 사람들 눈에 띄고 싶습니까?"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귓가에 속삭여진 그 말은, 곧이어 그의 혀가 내 귓바퀴를 핥고 지나가는 소리에 푹 파묻혀 버렸다. '우아아아악----!' 내 소리없는 외침이 계속되는 가운데.... Knight 데인은 내 뒷목에 다시금 살며시 이를 세우고, 쪼옥---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 살을 빨아들였다. 분명히 소독 어쩌고 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조금 전 Knight 데인이 빨아들인 자리는, 그때... 북부 야만족 녀석이 슬쩍 핥아 올렸던 바로 그 자리였다. Knight 데인은 그런 상황에서, 언제 또 그런 세세한 행동까지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그렇고.... 이제 그만 하라고---! 이런 소독 따위가 있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으니까! 가만히 목뒤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가는 조금 전부터 근질거리기 시작한 몸이 영 이상하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Knight 류안...." 그런 내 귓가에 살이 빨리는 소리대신 들려오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심장을 얼려버릴 정도로 싸늘한 저음이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Knight 데인의 무시무시한 저음을 들어왔던 나였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심장 저 깊을 곳을 슬그머니 긁어내는 듯한 저음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에피코엔느....." 그리고, 그의 그 말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나는 산산조각이 되어, 금방이라도 돌 바닥에 흩어질 것만 같았다. "에, 에피코엔느...?" 비명소리가 쑥 들어간 내 입에서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는 틈을 타, 나는 기어 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 순간, Knight 데인이 나를 홱--- 돌려세웠다. 나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Knight 데인이 어딘가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내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Knight 류안?"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나 전혀 여자답지 않은 목소리로 마음껏 떠들어대면서도, 크게 소리내어 웃으면서도, 어색한 옷차림으로 삐딱삐딱 걸으면서도, 이것저것 레이디들이 관심 없어하는 이야기들을 떠들어대면서도.... 바보같이.... 나는.... 그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사실은 계속 모른 척 하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원하던 것처럼, 당신이 나에게 크게 한방을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모른 척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내 크게 떠진 눈가를 그의 긴 손가락이 가만히 더듬어 왔다. "계속, 당신과 함께 이야기하고, 떠들고, 웃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당신과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Knight 류안." 내 이마 위에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떨어져 내렸다. 내 눈꺼풀을 덮으며 흘러내린 그것은, 내 입술 위를 지긋이 눌러왔다. 조심스럽게 내 아랫입술을 문질러오는 그의 아랫입술을 느끼며, 나는 나도 모르게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우악----!' 갑작스런 침입에 다시금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맞닿아 있는 그가 비명은 물론이고, 내 숨결까지도 한꺼번에 훔쳐갔다. 거침없이 파고 들어온 그가 마구잡이로 내 안을 떠돌아다니는 통에, 나는 그의 혀를 피해 도망 다니는 데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내 어깨에 머물러 있던 그의 손이 내 허리께로 쓸려 내려간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Knight 데인이 입술을 가볍게 맞댄 채로 나즈막하게 웃으며, 속삭여 올 때까지도.... "그럼.... 모로세르크경이 자신의 에피코엔느가 소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바로 오늘이 되는 거로군요." "에?!" 그 말에, 내가 어느샌가 꼭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을 때였다. 얇은 셔츠를 파고들어 맨살의 허리를 지분거리던 Knight 데인의 손이, 느닷없이 내 바지 속으로 쑥 스며들어온 것은.... "우와악---!! 흐읍!" 동시에, Knight 데인은 다시금 재빨리 내 비명소리를 머금었다. 이번엔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내 혀를 잡아서, 순식간에 감아 올리기까지 했다. "으으읍---!" 나는 거칠게 발버둥 쳤지만, 그렇게 발버둥칠수록, 내 아래쪽을 감아쥐는 Knight 데인의 손길은 그에 답하듯 더욱 거칠어져만 갔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 끝을 손끝으로 장난스레 톡톡 건드리며, Knight 데인은 내 입술 위에 속삭여왔다. "당신의 말대로.... 정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귀여운 에피코엔느로군요. Knight 류안...." 심장을 가볍게 긁으며 간지럽히는 저음의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던 Knight 데인은 긴장으로 떨고있는 내 입술을 살짝 핥아 올려 주었다. "나의 류안...." ************** 덜컹, 덜컹! 문 밖에서건, 문안에서건 열심히 문을 흔들어 보았지만, 굳게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방안에서 문손잡이를 죽어라 당기고 있던 내가 버럭 소리를 내 지르자, 문 밖에 있던 친구 녀석들이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야! 조용히 해! 지금은 한밤중이라고!" "몰래 빠져나가는 녀석이 그렇게 있는대로 소리를 질러서, 어쩌자는 거야?!" "이러다 들키면, 다 네놈 탓이라고!" 그리고, 그후 한참을 말없는 공동작업을 벌였지만, 문은 여전히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마에선 팥죽같이 땀이 흘러내리고.... 문손잡이를 잡고있던 손에 벌겋게 자국이 남고.... '에잇---! 그만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내가 방바닥에 막 털썩 주저 앉아버렸을 때였다. "앗! 여기, 자물쇠가 걸려있잖아?!" "정말이네! 누가 이런 짓을....?!" "작정을 하고 걸었는지, 자물쇠 하나 엄청나게 크군." 밖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친구 녀석들의 그 목소리에, 나는 다시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생각했다. Knight 데인 짓인가...? "물러서." 방안에서 나즈막하게 위협하는 내 목소리에, 친구녀석들이 화들짝 놀라며 물어왔다. "뭘 어쩌려고 그래?!"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대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멀찍이 물러서라고!" 웅성거리며, 친구 녀석들이 문에서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자,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다음순간, 있는 힘껏 발로 문을 걷어차 버렸다. 우지직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문이 통째로 복도로 쓰려졌다. 그 쓰러진 나무문을 밟으며, 복도로 걸어나오는 나를 보고, 친구 녀석들은 축하의 박수대신, 가볍게 혀를 찼다. "역시.... 힘 하난 무식할 정도로 세구나, 류안." "북부 야만족 녀석들도 울고 갈 실력이야." 북부 야만족 어쩌고를 입에 담는 윌리엄 녀석쪽을 힐긋--- 노려보자, 윌리엄 녀석은 냉큼 자신의 손을 등뒤로 감추며 말했다. "아, 아니... Knight 데인도 울고 갈 실력이라고...." 나는 북부 야만족이란 말보다, Knight 데인이란 이름에 더욱 화르륵--- 전의를 불태우며 TPO에 연연하지 않고,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제길---! Knight 데인!!! 자물쇠 따위로, 감히 날 가두려 들어?! 어디 두고보자고! 내가 오늘은 기필코 포도주를 마시고 말테다!" 그렇게 소리지른 나는 기숙사의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스르르릉--- 그때, 달빛을 등지고 나타난 기다란 그림자가, 턱하니 내 앞을 막아서더니, 음산한 소리를 내며, 칼을 길게 뽑아들었다. "그럼.... 어디 두고볼까요, Knight 류안?" 천천히 뚜벅뚜벅 걸어온 긴 그림자는 점차 그 음영이 뚜렷한 차가운 얼굴을 내 눈앞에 드러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Knight 데인---!!!" 내 뒤를 성급히 따라오던 친구 녀석들은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고.... 나는 가만히 '제길'이라고 읊조렸다. "꼭 그렇게 나가야 한다면.... 칼을 뽑으시죠, Knight 류안. 저를 이기고 가십시오." "칫...."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단숨에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곤 이를 갈 듯이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내가 못 이길 줄 알아?!" 그런 내 거친 목소리에 이어, 그것과는 정 반대되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Knight 데인과 나 밖에 없는 텅 빈 복도를 은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단.... 오늘도, 제가 이기면.... 제 팔 안에서 얌전히 잠들어 주셔야 겠습니다. Knight 류안." - END -